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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November 29, 2020

“누가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인가?”…0원과 29만원의 조비오와 전두환의 삶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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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소화자매원 원장이 기억하는 조비오 신부
조비오 신부가 평생 돌봐온 광주 남구 사회복지시설 소화자매원 가족들과 찍은 사진. 소화자매원 제공
조비오 신부가 평생 돌봐온 광주 남구 사회복지시설 소화자매원 가족들과 찍은 사진. 소화자매원 제공
‘통장잔고 0원과 29만원’ 30일 전두환(89) 전 대통령 판결을 앞두고, 전씨를 다시 법정으로 불러낸 고 조비오(1936~2016·본명 조철현) 신부가 누군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 신부가 선종할 당시 그의 통장잔고는 0원이었다.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던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본인이 가진 돈, 책, 심지어는 장기까지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내놨다. 전씨도 통장잔고가 “29만원뿐”이라며 가진 게 없다고 항변한 바 있다. 하지만 1000억원에 가까운 추징금을 미납한 그는 정부와 지루한 ‘돈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헌신적인 사제이자 든든한 아버지, 튼튼한 울타리였어요.” 지난 27일 광주광역시 남구 여성장애인복지기관 소화자매원에서 만난 이영희(67) 엠마누엘 원장수녀가 떠올린 고 조비오 신부의 모습이다. 1978년 조 신부가 소화자매원과 인연을 맺은 뒤 40여년 간 곁에서 지켜봤던 이 원장은 “조비오 몬시뇰(교황청 명예사제)은 프란치스코 성인과 소화 테레사 성녀처럼 항상 가난하고 겸손했다. 우리에게도 ‘항상 작은 꽃이 되라. 더 커지려고 하지 말고 작은 그대로 행복하게 살아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회상했다. 젊은 시절 권투를 배우는 등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던 조 신부는 늦은 나이인 26살(1962년) 때 광주가톨릭신학교에 1기로 입학해 33살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그는 나주성당 주임신부 시절(1973∼1976) 가톨릭농민회를 지도했고 5·18민주화운동 때는 수습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죽음의 행진’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9년 2월 광주청문회 때는 “군인들이 개처럼 사람들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 내가 성직자이지만 엠(M)-16 소총이 있다면 (군인들을) 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미사를 집전하는 조비오 신부.소화자매원 제공
미사를 집전하는 조비오 신부.소화자매원 제공
조 신부는 사회적으로는 강직한 모습이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수행자에 가까운 근검절약 정신을 보였다. 2006년 퇴임 이후 봉선동에 머물며 동네에서 가장 싼 5천원짜리 이발소만 갔다. 한여름에도 선풍기로 더위를 버티다가 건강을 염려한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중고 에어컨을 설치할 정도였다. 조 신부의 식복사(사제를 돕는 사람)가 헤지고 너무 오래 입어 누렇게 변한 그의 내의를 몰래 버린 일도 있었다. 70대에 들어선 조 신부는 다리에 힘이 없어 자주 넘어지며 바지에 구멍이 나곤 했지만 새것을 사지 않고 항상 꿰매 입었다. 세상을 떠나던 해인 2016년 1월 소화자매원 가족 200여명과 식사를 함께 한 팔순잔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인을 위한 일이었다. 자신에게는 인색했지만 이웃에게는 관대했다. 1984년 전남 진도성당 주임신부 시절 성탄미사를 하고 싶다는 소화자매원 가족들의 소망을 듣고 밤길을 달려 소화자매원을 찾았다. 1985년 소화자매원이 시설 신축을 할 땐 저금과 후원금을 모아 2000만원을 전달하는 등 절약으로 모은 돈은 이웃을 위해 썼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광주 광산구 삼거동 수녀원과 사제관 신축에 자금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1억원을 전달하며 “나 이제 돈 하나도 없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선종 이후에는 국제구호단체의 후원금고지서가 조 신부 앞으로 날아오며 남몰래 외국 어린이를 위해 후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반면, 조 신부를 자신의 회고록에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로 비난한 전두환은 ‘오월의 학살자’다. 대법원은 1997년 4월17일 반란(내란)수괴·내란·내란목적살인 등의 죄목으로 전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12·12는 명백한 군사반란이고, 5·17과 5·18은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행위였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1995년 12월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전씨는 1997년 12월 사면돼 풀려났다.
오월의 학살자 전두환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 사진
오월의 학살자 전두환 전 대통령. <한겨레> 자료 사진
하지만 전씨는 5·18에 대해 단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그는 오히려 2017년 4월 낸 회고록을 통해 학살을 합리화하고 오월 진실을 왜곡했다. 전씨는 회고록에서 “5·18사태의 발단에서부터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할 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또 “5·18재판은 공정하지도, 온당하지도 않고 괴상하다고나 해야 할 기이한 재판이었다”고 사법부를 조롱했다. 뇌물수수죄로도 처벌을 받은 전씨는 추징금 2205억원도 선고받았지만 현재 991억원의 추징금을 미납한 상태다. 전씨는 2003년 법원에 29만1천원의 예금과 채권 등을 재산목록으로 제출하기도 했다. 전씨는 검찰이 미납 추징금을 환수하려고 연희동 자택에 대한 압류 처분을 하자, 전씨 쪽은 2018년 12월 소송을 제기해 검찰과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다. 전씨는 2018년 5월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으면서도 평온한 일상을 즐겼다. 알츠하이머 병력을 이유로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던 전씨는 2019년 11월에는 지인들과 골프를 즐기고 2019년 12월에는 서울 강남 한 중식당에서 지인들과 1인당 20만원짜리 점심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 자리엔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함께 일으킨 전직 장성 등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1979년 12월12일 군사 쿠테타를 통해 군을 장악한 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쿠데타 참여 군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 줄 원안이 전두환씨. &lt;한겨레&gt; 자료 사진
1979년 12월12일 군사 쿠테타를 통해 군을 장악한 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쿠데타 참여 군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 줄 원안이 전두환씨. <한겨레> 자료 사진
경남 합천 출신인 전씨는 5·16 쿠데타 직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성사시킨 뒤,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다. 1979년 3월 소장 때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전격 등용됐고, 10·26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으로 비상계임이 선포되자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부임했다. 전씨는 1979년 12월12일 군부 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 중심의 반란군 세력을 통해 군을 장악한 뒤, 5·17 쿠데타를 통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권’을 탈취했다. 80년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하고 별 넷을 달고 전역한 전씨는 80년 9월1일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김용희 정대하 기자 kimyh@hani.co.kr ▶바로가기 : 전두환 광주재판 이끈 고 조비오 신부는 누구?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85390.html ‘오월의 사제’ 조비오 몬시뇰 선종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620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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